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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치단체로서의 흥사단

1945년 11월 11일 송종익·한시대·김병연 등의 재미 단우와 유진동·김붕준 등의 원동 단우들의 귀국을 환영하는 모임에서 흥사단 운동의 국내 재건을 결의하고, 12월 27일에 국내외 단우 33명이 모여 재건 준비를 위한 첫 회합을 갖고, 국내 위원부 위원 12인을 선출함으로써 국내에서의 흥사단 운동이 재개되었다. 첫 위원장은 김윤경이었고, 이듬해 장리욱이 위원장을 맡아서 본부 이전을 위한 절차를 밟게 되었다.

이 무렵 한국 사회에는 새로운 국가 건설을 앞두고 정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던 때라, 흥사단의 이런 움직임을 정치 활동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단 내부에서도 흥사단을 정당으로 개편하자는 일부 단우들의 주장이 있었으므로, 1946년 6월 21일에는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즉, “흥사단은 결코 정치 단체가 아니며, 따라서 어느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지지 또는 반대하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천명하였다. 이 문제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논란이 되어 결국 1947년 개정된 약법 제 6조에 “본단 운동의 항구성에 감하여 본단은 정치활동에 관여치 아니함. 단, 단우 개인의 자격으로 그 소신과 양심에 비추어 행동하는 자유가 있음.” 이라고 명시하였다.

국내 위원부와 미주 본부와의 긴밀한 연락과 협조 하에 본부 이전을 위한 준비를 하는 한편, 1946년 9월 28일은 해방된 조국에서 최초의 국내 대회가 서울 종로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는 79명의 단우와 각계각층의 내빈 91명이 참가하여, 선언문·행동 강령· 훈련 요강·<동포에게 격함>이라는 호소문을 채택·발표하였다.

통산 제 35차 대회가 되는 이 국내 3차 대회를 계기로 국내에서의 단세는 날로 확장되어 가고, 새로 입단하는 단우도 급격히 늘어나고 부산·대전·춘천·수원·인천·연백 등지에 지방 조직도 창설되어 이듬해 4차 대회는 서울의 중부 대회와 부산에서의 남부 대회로 나누어 시행하게 되었다. 기록으로 보더라도 입단자 수가 1948년에 207명, 1949년에 185명으로 1961년까지의 연도별 입단자 통계에 있어서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단우의 증가와 더불어, 1948년 3월에는 청년부가 창립되고, 1949년부터는 반조직이 이루어져서 정기적인 수련 집회인 ‘월례회’와 별도로 다양한 수련활동이 전개 되었다.

6ㆍ25 민족적 비극과 사회적 혼란속에서 다양한 활동과 사업전개

6·25 동족 상잔의 비극은 우리 민족에게 인명과 재산은 물론 정신적으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민족적 대 재앙이었다. 흥사단 역시 이런 재앙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인명의 손실, 귀중한 사료의 소실과 분실, 건물의 부분적인 파괴 등 참으로 가슴 아픈 손실을 입었다. <흥사단 운동 70년사>에 기록된 것만 하더라도, 조영후를 비롯한 5명의 단우가 피살되고, 백인제·이광수·김동원·김여식 등을 비롯한 24명의 단우가 납북되었고, 도산 선생 언행록 원고와 창단 때부터의 <단보> 등 많은 사료들이 압수당하거나 소실되었다.

1951년 11월 25일 부산시 중구 부평동에 흥사단 임시 연락 사무소를 설치하고, 이사회와 월례회를 계속하고, 단보를 속간했다. 이런 전쟁의 와중에서도 이승만 정권은 발췌개헌안을 통과 시키고 정가(政街)는 더욱 어수선하고 사회는 혼란했다. 아울러 흥사단에 대한 자유당 정권의 모략은 더욱 심화되었다. 그런 가운데서 흥사단은 도산전기를 다시 발행하여 보급하고, 53년 2월 2일에는 본부 연락 사무소를 대청동 성광치과 2층으로 옮기고, 5월 13일 부산 시공관에서 단우 및 내빈 250여 명이 창단 40주년 기념 대회를 개최했다.
한편 송종익 하희옥 등을 중심으로 하는 미주 위원부의 단우들은 조국의 참상을 전해 듣고, 수차에 걸쳐 구제품과 구제금을 모금하여 보내왔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조인되고, 9월에 서울로 복귀한 본부는 서둘러 전쟁의 상처를 복구하고, 조직을 정비해 나갔다. 정부로부터 <단보>의 발행 금지 처분을 받고, 편지적 성격을 띤 부정기적 소식지의 형식을 갖춘 <공함>으로 바꾸어 발행하고, 대회와 각종 수련 활동과 대외 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흥사단은 자유당 정권의 부정과 부패에 맞서서, 강좌와 언론 혹은 청년 운동을 통하여 당시로서는 정치단체를 제외하고는 거의 유일한 비판적 세력으로 존재해왔다. 금요강좌를 통한 국민 계몽과 비판적 기능과 <새벽>을 통한 언론 활동은 직접 간접으로 민주화 과정에 기여했으며, 특히 4·19 직전에 발행된 <새벽> 3월호, 4월호, 5월호의 내용을 보면 가히 ‘지상 데모’라고 일컬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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