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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자 도산 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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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7-02-03 00:00 조회2,63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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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자 도산 안창호


◆ 평범한 출생, 위대한 생애

도산 안창호 선생은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대동강 하류 도롱섬에서 농사를 짓는 가난한 선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소를 돌보는 목동 일을 하면서 동네 한문 서당에서 글을 배웠다. 11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2살 때 노남리로 이사하여 그 곳에서 김현진이라는 선비에게 글다운 글을 배우게 되었다. 이 무렵 같은 서당에 다니던 서너 살 위의 필대은과 친분을 맺으면서 신학문에 접하게 되었다.

 

6세 때 청일전쟁을 겪으면서 소년다운 울분으로 나라 사랑의 마음을 다짐했던 도산은 서울로 상경하여 무료로 신학문을 배울 수 있다는 기대감에 밀러스쿨(지금의 경신학교)에 입학하고 본격적인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19세 때는 서재필이 주도하던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필대은과 함께 평양에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결성하였으며,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첫 연설을 함으로써 탁월한 웅변가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이후로 독립협회 활동을 계속하면서 약관의 나이 21세에 점진학교를 설립하여 민중에게 신학문을 접할 수 있는 배움의 길을 열어 주었다.  

24세 때는 본격적인 신학문을 배우고자 이혜련과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공부보다는 국권회복운동을 지원할 목적으로 교민사회의 교화운동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1905년에 미국에서 조직한 공립협회는 2년도 채 안돼는 단기간에 600여명의 회원을 모을 정도로 힘있는 단체로 성장하였다.

공립협회가 자리를 잡고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게 되자 도산은 1907년 국내로 돌아와 비밀결사체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애국지사들의 구국운동을 뒤에서 총 지휘하였다. 또한 교육의 필요성을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여기고 있던 도산은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하였고, 평양, 서울, 대구에 태극서관을 두고 국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평양 마산동에 자기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자본 형성을 위한 노력에도 선구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 무렵 일본 총독 이토가 약관의 나이 29세의 도산을 만나 소위 도산 내각을 만들자는 제의를 해왔으나 이를 일축한 후로 일경의 요주의 인물로 주목을 받는 처지가 되기도 하였다.

1909년 도산은 국내 최초의 청년운동 단체인 청년학우회를 창설하는 등 전 국민을 상대로 조직화 운동에 착수하던 중 안중근 의사 사건으로 서울 용산의 헌병대에 수감되었다가 2달 만에 석방되기도 하였다.
1910년 한일합병이라는 역사적인 국치를 눈앞에 두고 해외 망명길에 오른 도산은 북경, 상해, 블라디보스톡 등지를 유랑하면서 해외 활동 중인 독립운동가들과 합동으로 청도회담을 개최하였으나 그 결과는 암담한 현실로 나타났다. 미국으로 건너간 도산은 1912년에 대한인국민회를 조직하고 이끌었고, 1913년에 흥사단을 창립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도산은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기초를 확립하고 국민대표회의를 여는 데 힘썼으며, 한국독립당을 만들었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본격적인 반일 투쟁을 위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려고 노력하던 중 그는 불행하게도 이듬해 일경에 의해 체포되어 국내로 끌려오게 되었다.

국내에서 두 차례의 옥고를 치른 끝에 도산은 결국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38년 3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도산은 쉴 새 없는 구국독립의 실천 활동 속에서도 한편으로 우리 겨레가 일제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이며 더 나아가 살기 좋은 이상적인 나라를 만들어 영원히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나름대로 깊이 연구하였다.

그래서 도산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결론을 얻게 되었다.  

먼저 도산은 우리가 일제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적절한 기회에 그들과 전쟁을 해서 승리하는 데 있다고 보아 최소한의 근대적 무력을 준비해 두자는 독립전쟁 준비론을 정립했다.
동시에 도산은 독립을 이룬 다음에는 모든 국민들이 자유롭고 고르게 잘 살 수 있도록 참된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민주국가건설론을 갖고 있었다.
또 독립을 이루고 민주국가를 세워 번영을 누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민족을 위해 헌신할 지도적 인물의 양성이 중요하다고 보고 민족운동의 지도적 인물양성기관으로서 흥사단 운동론도 폈다.
 

◆ 도산이 오늘에 주는 교훈

 도산은 말 그대로 오로지 나라와 겨레를 위한 삶을 살았다. 도산의 60평생 가운데 그 전반은 나라를 지키기 위한 노력에 두어졌으며, 후반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한 싸움에 바쳐졌다.

"개인은 제 민족을 위해 일함으로 인류와 하늘에 대한 의무를 다한다"라고 애국 애족적인 인생관을 밝힌 바 있는 도산은 실제로 평생을 자신과 가정의 편안함을 돌볼 겨를도 없이 오로지 위기에 처한 나라와 겨레를 구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다. 그리하여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독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마침내 두 차례의 옥고를 치른 끝에 타계하였던 것이다. 말로써가 아니라 몸으로 직접 앞장 서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준 진정한 애국적 지도자였다.

도산이 세상을 떠난 지 이미 반세기가 지났다. 하지만 도산은 아직도 완전히 과거 인물만은 아니다. 그의 독립운동 업적은 과거의 일이라고 쳐도 그의 인격과 사상은 아직도 우리에게 살아 있는 유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산은 우리 나라 근 현대사의 여러 인물들 가운데서 가장 성실한 자세와 정직한 마음씨를 가졌던 참으로 인격적인 지도자로 알려져 있다.
도산은 청년들에게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하라"고 가르쳤다.

21세기 한국 사회는 내외적으로 많은 변화와 개혁의 과제에 직면해 있다. 세계화 시대를 맞아 경쟁력을 갖춘 당당한 민족으로서 거듭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통일국가도 이루어야 하겠고 부패없는 맑고 투명한 사회도 만들어야 한다. 사회 구석구석 뿌리박혀 있는 낡은 관습과 비민주적인 요소를 털어 내어 진정한 의미의 인간해방과 민주화를 이루어야 한다. 교육을 살려 국가 경쟁력도 갖추어야 하겠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밝고 긍정적이고 창의적인 가치관을 심어 주어 나라의 미래를 가꿔갈 수 있게 해야 한다. 도산이 강조한 민족의 3대 자본 즉, 지식과 신용과 금전의 자본 축적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가치로 강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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